생각과 글

가을이면 앓는 병

HJJH 2004. 10. 31. 21:49


가을처럼 여행에 알맞는 계절이 또 있을까? 모든 정을 다 결별하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. 엷어진 일광과 냉냉한 공기 속을 어디라고 정한 곳 없이 떠나버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난다. 매일 매일의 궤도에 오른 생활이 뽀얀 오후의 먼지 속에서는 유난히 염증나게 느껴진다.

여름의 생기가 다 빼앗아 가버린 나머지의 잔해처럼 몸도 마음도 피로에 사로잡히게 되고 생 전반에 대해 지긋지긋한 느낌을 갖게 된다.

이럴 때 어디로 떠났으면!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. 출발을 생각하며 자기의 정해진 궤도 밖으로 튀어나갈 생각에 몸부림친다. 이 결별한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(새로운 빛과 음향 속으로의)로서 그 생각 끝에는 결국 <죽음>이라는 개념에 고착해 버리게 되고 마는 까닭에 나는 몸부림치는 것이다.

긴 여행 - 돌아오지 않는 여행, 깨어남 없는 깊은 잠······ 이러한 것들이 가을이면 매번 나의 고정관념으로 되어 버린다.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의 냉기와 검은 빛의 조락(凋落)은 나에겐 너무나 죽음을 갈망하는 자태로 유혹을 보내온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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전혜린의 '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' 중에서

10월의 마지막 날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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